[ⓒ 한국선진화포럼 지암선진화아카데미 선진화다이얼로그. 2014.07.08] 선진화 포럼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복지국가, 그리고 선진문화’를 선진화의 4대 축으로 규정한 바 있다. 처음 3개 항목은 가시적 제도화가 가능한 만큼 정의도 명료하나 마지막 선진문화는 매우 추상적이다. 그러나 선진 제도 작동의 성패는 시민 역량에 달려있고 선진문화는 시민 역량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복지국가의 틀을 갖추었어도 시민 역량이 후진적이면 선진화는 어렵다. 후진국을 벗어나는 과정의 문화적 충격만으로 선진국이 된 듯 착각하는 개도국의 후진적 행태는 모두 선진문화의 결함에서 비롯한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시민 인식은 선진화의 기본
선진문화의 핵심인 ‘자유’와 ‘민주’는 후진국에서는 외래 개념이다. 문화의 선진화는 이 개념에 대한 시민 인식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유’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구속의 거부다.
그러나 각자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하면 그 결과는 서로 수시로 충돌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충돌은 서로 남의 자유를 존중할 때 피할 수 있으므로 각자 자유는 그렇게 행사하도록 제한되어야 한다.
자유 사회에서 자유 허용 범위는 원칙적으로 다른 이의 자유를 침탈하지 않는 한도 이내로 제한된다. 폭력은 강제로, 도둑질은 부당하게, 그리고 사기는 속임수로 각각 상대를 내게 복종하도록 강요하므로 전형적 자유 침탈이다. 그러므로 선진문화는 폭력, 도둑질, 그리고 사기 등을 행사할 자유를 당연히 금지한다.
물량이 유한하고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내가 먼저 가져 버리면 다른 이가 가질 자유를 잃는다. 이처럼 어떤 이가 가지면 그 때문에 못 가지는 이가 반드시 생기는 상황에서도 개인별 자유는 서로 충돌한다. 마을 우물은 마을 사람들이 공유하고 문전옥답은 주인이 따로 있다.
선진문화는 공유해야 한다면 이용 규칙을, 그리고 사유를 허용한다면 가질 자격과 절차를 합의하고, 합의한 대로 사용하고 가지도록 조치함으로써 충돌을 막는다. 선진 사회는 남의 자유를 침탈하는 자유는 금지하고, 부족한 물량을 이용하거나 가질 요건은 다수결로 정한다.
다수결은 목표가 자유 창달이지만 내용이 자유의 제한이다. 문화가 후진적이면 민주적 다수결은 자유의 기반을 약화하거나 때로는 야만적 결정으로 퇴행하기도 한다. 다수결이 소수의 권리를 박탈하더라도 통제할 방도가 없다.
다수결의 횡포를 막는 제도적 방법은 다수를 과반수로, 나아가서 2/3 찬성 등으로 의결을 어렵게 만드는 방법뿐인데 의결을 주도한 다수의 생각을 2/3 이상의 다수가 공유해 버리면 허사다. 압도적 다수의 의식이 야만적이면 다수결은 사회를 야만적 결정으로 몰아간다. 히틀러의 나치를 지지한 독일이 좋은 예다.
자유 제한에 대한 시민의식이 적대적으로 양극화하여 서로 팽팽히 맞서면 다수결은 일관성을 상실하고 그때그때 양극단을 오고 간다. 자유 제한의 지침이 수시로 바뀌어 개인은 자유 행사를 계획하기가 어렵고 사회도 혼란에 빠진다.
선진 제도를 잘 갖추어 두고서도 개인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사회적 협력은 방향을 잃고 침체한다. 흥분한 대중이 한쪽의 선동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다수결은 반대파를 말살의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선진적 민주주의는 적과의 공존이다
그렇다고 다수결을 버림으로써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도 없다. 유일한 해법은 서로 다름이 극한적으로 대치하지 않으면서 서로 수용하는 조화로 공존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서로 반대하고 미워하되 공존의 틀 속에서 반대하고 미워하면 적대적 대치도 자생적 질서로 진화한다.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인간 사회의 역동적 발전은 끊임없는 이질적 분화를 동력으로 삼는다. 한쪽의 멸절이 적대의 종말은 아니므로 선진화한 해법은 척결 아닌 공존이다.
일단 합의한 공존의 틀을 다수결의 변덕으로 극단을 오가게 방치하면 자유 행사가 혼란에 빠진다. 공존의 틀은 개헌처럼 장기간의 연구 토론 과정을 거쳐서 고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 관례다.
양심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인신의 자유 등은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적 자유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사회적 결정에서 다수결은 가장 민주적인 방식이지만 다수결의 본질은 다수가 소수를 압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헌법이다. 개헌 절차가 복잡해도 결국 찬성 비율이 높은 다수결로 개정할 수 있으므로 기본적 자유를 다수결의 횡포로부터 보호할 제도적 방법은 없다. 다수결의 민주주의는 압도적 다수가 마음만 먹으면 기본적 자유조차 언제든 유린하는 위험을 대비해야 한다.
선진화 도중의 후진국들은 시민이 후진적 관행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선진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문화의 선진화는 후진적 관행을 벗어던져야 가능한데 각자 남의 관행적 잘못은 비판하면서 내 잘못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한다.
전형적 사례가 한국이다. 한국은 87체제가 출범한 이후 우파와 좌파가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해 오면서 산업화에 이어 민주화도 성공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건국 당시 제정된 법규는 너무 이상에 치우쳐서 정부조차 준법할 수 없는 정도였다.
예컨대 1970년의 한국은 넘쳐나는 농촌의 유휴 인력이 최저 생계비 임금이라도 취업하겠다고 공장으로 몰려드는 판이었는데 노동법은 근로 시간과 초과 근무 수당을 의무화하고 있었다.
공장이 더 많이 생겨야 취업 희망자를 더 많이 채용하므로 정부는 노동법의 강제 시행을 유예할 수밖에 없었고 전태일 청년의 분신은 이에 분개한 항의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항의에 공감했으나 선뜻 정부를 탓하지도 못하였다. 준법의 가치와 탈법의 현실이 빚는 모순을 체념하는 후진적 관행의 예다.
길지 않은 헌정사에 최초로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문화재단 설립에 대기업 출연을 촉구한 것이 전례에 비추어 과연 탄핵 사유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탈법은 당연한데 그보다 더한 일들을 자행한 전임들은 모두 무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후진적 탈법 관행의 뿌리는 깊다.
후진적 관행을 버려야 선진문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건에 수많은 사람이 ‘내가 조국이다’를 외치며 나섰다. 그와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이 많은데 법원이 그 행동을 유죄로 평결한 데 대해 반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그가 창당한 정당은 지난 총선에서 비례대표만으로 제3당으로 도약하는 이변을 연출하였다.
여고생 제1저자의 학술 논문이 의학 저널에 게재되는 현실은 어떻게 보아도 정상이 아니다. 여고생이 자력으로 만든 결과일 리는 없고 그 부모와 연구를 실제 진행한 교수의 합작임이 분명한데, 같은 유형의 비리가 보편화된 관행이라는 이유로 무죄라는 시민의식은 과연 선진적일까?
관행상 크게 문제 되지 않을 사안이라도 범법이라 대통령 탄핵의 사유가 된다면 아무리 다수가 저지르는 관행이라도 법원 평결이 유죄면 유죄로 받아들여야 선진 사회다.
선출되지 않은 법관이 선출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단죄할 수 있느냐는 물음의 바탕에는 민주주의를 다수결 만능으로 보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시각이 보는 민주적 재판은 법치적 재판이 아니라 인민재판이다. 적들이 함께 공존하는 틀을 결정하는 규칙이 법인데 다수결이 법치를 무시하면 공존의 틀도 무너진다.
이재명 대통령의 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으로 의회를 지배하면서 검수완박, 줄 탄핵, 그리고 예산삭감 등으로 정부를 압박해 왔지만, 정작 그가 당선할 때의 대선 득표율은 50%에도 이르지 못했다. 좌도 우도 시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수결을 좌우하는 표심이 공감의 조화보다 팽팽한 대결로 치달으면 민주주의가 자유 행사를 위축시키기에 딱 좋은 상황이다. 선진화의 4대 축 가운데 앞의 3개 축을 달성하더라도 시민의식이 사회적 가치에서 극심하게 분열되면 이 역설을 피하기 어렵다. 아마 선진문화의 창달은 선진화의 4대 축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해내기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시민이 외래 개념인 ‘자유’와 ‘민주’를 깊이 이해하고 공존의 자생적 질서를 수용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법치를 무시하는 후진적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모두 남의 관행만 탓하는 ‘내로남불’이 문제다.
[ⓒ 한국선진화포럼 지암선진화아카데미 선진화다이얼로그. 2013.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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