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진화포럼은 벌써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남덕우 총리님이 가신지도 벌써 12년이 지났다. 남 총리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 게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정말 유수와 같다.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나라 안팎의 불확실성과 엄청난 변혁을 생각할 때 남 총리님의 철학과 혜안이 너무나 아쉽다. 지금 우리 곁에 계셨다면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해법을 명쾌히 제시해 주시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필자가 회고하기에 남 총리님이 한결같이 품고 계셨던 철학과 이상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는 “자유”다. 한국선진화포럼이 창립될 때는 2005년이었다. 그때 한국 정부는 경제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정경유착을 차단하고 관치경제를 청산하며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정부의 인사행정 및 예산 집행 시스템을 대폭 쇄신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얼핏 들으면 당연한 얘기 같으나 사실상 이러한 정책은 정부 각 부처는 물론 민간 시장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과 압력으로 느껴졌다. 이를테면 모두가 새로 등장한 정부의 “성향”을 파악하느라고 눈치를 보기 일쑤였고 정부 공무원들과 민간 기업들은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

결국은 경제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가 되었다. 이때 남 총리께서는 새 정부가 청렴과 정직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시장경제에서 필수적인 “자유”를 억압하는 수준까지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

특히 주요 기업들을 세무사찰을 하면서 다른 기업들도 움츠리게 하는 정책은 결코 옳지 않다고 생각하셨다. 현존하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철저히 감시하면 되는 것이지 몇 개 기업을 희생양 삼아 다른 기업들을 위협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자본주의의 근본은 “자유”임을 늘 강조하셨다.

둘째는 “성실”이다. 우리나라 공직자 중에 남 총리만큼 성실한 분은 찾기 힘들다. 경제 부총리를 하실 때나 총리를 하실 때 그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국가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고 원칙에 맞는 일이라면 지극히 세심하게 도와주시고 또 챙겨 주신다.

우리나라가 동북아 지역의 중심 국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총리님의 소신과 이론은 실로 확고하셨다. 동북아 경제포럼을 주도 하셨고 또 동북아 개발은행 창립의 필요성도 강조하셨다.

한번은 이러한 총리님의 구상과 일치하는 국제행사가 인천 송도에서 열렸는데 이를 중요하다고 생각하시고 그 추운 날씨에 송도까지 직접 오셔서 축사해 주셨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인천 송도는 미국의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인 제넨테크사와 긴밀한 협업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총리님의 성실하심 때문에 외국 기업인들도 한국 정부를 믿고 투자 결심까지 해 준 것이다.

셋째는 “국민”이다. 총리님의 마음속에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당당한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킨 것은 우리 국민의 근면성, 높은 애국심, 남다른 교육열, 그리고 창의성이라고 평소에 강조하셨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필자가 미국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재미 경제학자들과 한국 경제학자들의 합동 콘퍼런스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였다. 첫날에 총리님께서 축사해 주셨고 필자가 답사했던 일이 있었다.

총리님의 축사는 물론 높은 수준의 감동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필자가 답사하는 중에 우리나라 경제의 건실한 발전을 이끌어 주신 남덕우 총리님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는 내용이 있었다.

개회식이 끝나고 총리님이 자리를 뜨실 때 필자가 배웅하였다. 총리님과 같이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총리님이 내 등을 두드리시면서 “유 교수, 답사 참 고마웠어요. 그런데 답사 중 한 군데 고칠 내용이 있어요.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끌어 온 것은 내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민입니다. 국민이 훌륭했기에 오늘의 성공이 가능했던 겁니다. 이를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충고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경제는 앞으로도 수많은 고비를 겪을 터인데 이러한 우수한 국민이 있는 한 모든 난관을 잘 극복하리라 믿는다는 말씀도 하셨다.

위의 자유, 성실, 국민 세 키워드만 가지고 남 총리님의 인품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으랴. 한국선진화포럼을 창립하시고 8년 동안 이끌어 오시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포용의 마음, 인내심, 겸손, 그리고 차분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설득력 등등 우리가 기리고 닮아야 할 덕목이 한둘이 아니다.

이를 선양하며 전수해 나가기 위해 지암(芝巖) 선진화 아카데미가 설립되고 지금도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운영되고 있음을 본다. 남 총리님은 당대의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가 미래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선 인재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셨다.

오늘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외교, 안보, 통상의 질서는 우려스러울 정도로 혼미한 상태다. 대변혁의 시대를 겪고 있다고 본다. 이럴 때일수록 이 나라에 좋은 길을 밝혀 주실 큰 어른이 계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극락에 가 계실 남 총리님께서 꿈에라도 우리 앞에 나타나 주셔서 이 민족이 크게 깨닫고 슬기롭게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귀띔이라도 해 주셨으면 한다. 남 총리님이 몹시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