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호] 병산서원에서 만난 서애 류성룡과 국난극복의 지혜
권순형(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병산서원은 조선 중기의 명재상인 서애 류성룡(1524-1607)과 그의 아들 수암 류진을 기리는 서원으로, 류성룡의 지혜와 리더십이 담긴 공간입니다. 병산서원은 배산임수와 조선 건축 철학을 뚜렷이 보여주는 건축물로, 건축물과 주변 풍경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합니다. 조선 시대에 수많은 제자들이 병산서원에서 류성룡의 정신을 배우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봉사 정신을 함양했습니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내며 조선의 내정과 군사를 총괄했습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전에도 이순신과 권율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요직에 등용하도록 하였고 각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여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습니다.
전쟁 중에 류성룡은 조선 후기의 군영 체제의 핵심이 되는 훈련도감을 최초로 설치하였으며 화포를 제조하고 성곽을 정비하는 등 군사력 강화를 꾀했습니다. 또한,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을 상대했으며, 후에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장악하는 청의 초대 황제 누르하치가 원군을 보내겠다는 야욕을 사전에 파악하고 그 제안을 거절하는 등 외교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류성룡은 말년에 낙향하여 저술에 힘썼는데 그때 쓰인 저서 중 유명한 것이 『징비록』입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하고 이에 대해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술한 것으로, 후대에 미래의 전쟁에 대비하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류성룡의 국난극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그는 전쟁 전부터 여러 조치를 통해 위기를 미리 대비하고자 하였고,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는 군영 체제를 처음으로 시작하여 당장의 전쟁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전쟁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울러 원군인 명나라 군대와 원만하게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힘을 한 데 모았고, 군사 하나하나가 당장에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의 원군 제안은 거절하면서 동아시아를 평정하고자 했던 그의 야욕을 미리 차단했습니다.
조선 말, 고종이 동학농민군을 물리치고자 청과 일본의 원군을 받았다가 오히려 일본군에 한성을 장악당했던 사건을 생각해보면, 국난 중에서도 냉철한 판단을 한 류성룡의 통찰력이 더욱 빛납니다.
만약 서애 류성룡이 없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유비무환의 자세, 인재를 알아보는 통찰력, 장기적인 안목과 협력, 더 큰 위기를 알아본 날카로운 판단력, 반성하는 자세 등은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국난극복의 지혜입니다. 류성룡의 지혜를 본받는다면 우리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난극복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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